금융칼럼 ‘김재호의 금융 이야기’

크로스 컨설팅 김재호 대표


김재호(金再虎 / Jay
 Kim)

국제 금융 컨설턴트

자격증 :
– 미국 증권업 (Series 7) 및 투자자문업 (Series 66)
– 미국 은퇴설계 카운슬러 (Chartered Retirement Planning Counselor)
– 보험영업 (뉴저지 주)

저서 :
– 외환시장의 실무 (1994. 증권서적)
– 금요일 모닝커피 (2013. 퍼플)

 

 

응답하라 1988 - 김재호의 금융 이야기

작성자
김재호
작성일
2016-01-15 21:23
조회
29212
[caption id="attachment_3862" align="alignnone" width="723"]응답하라 1988 포스터(출처 : TvN) 응답하라 1988 포스터(출처 : TvN)[/caption]

 

요즈음 케이블 TV에서 한창 주가를 올리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제목 하여 ‘응답하라 1988.’

지난 몇 번의 과거 회상 스토리를 주제로 한 드라마들이 있었습니다. 모두 ‘응답하라’라는 말로 시작하여 1997, 1994의 두 편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1988입니다. 1988년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올림픽을 개최한 해이기도 합니다. 전세계의 이목이 우리나라에 집중되었던 때입니다.올림픽 경기가 우리나라에 가져다 준 직접적인 경제효과보다는 경기를 치른 후의 경제효과와 정신적인 자신감이 우리나라의 경제에 활력을 불어 넣어 주었습니다.

이 당시에는 소위 ‘3저’(三低)라는 이름 아래에 미국 달러화, 금리, 석유가의 세 가지의 가치가 하락하여 우리 경제에 도움을 주던 시절이었습니다.미국 달러화의 한국 원화에 대한 환율 (US$/KRW)은 1988년 초 790원에서 시작하여 1988년 말에는 달러당 환율이 700원 아래로 떨어졌습니다.즉, 달러화가 약세를 보이고 원화가 강세를 보였습니다. 1988년 우리나라 원화의 시장실세금리는 연 15% 수준이었고 미국 달러화의 LIBOR는 연7~8% 수준이었습니다. 미국 서부 텍사스 중질유 (WTI, West Texas Intermediate)의 가격은 1988년 초 배럴당 $17 수준이었고, 연중 최저 가격은$12 수준까지도 내려갔습니다. 지금과는 많은 격차가 있습니다.

이러한 3 저 현상은 우리나라의 경제에 호황을 불러왔습니다. 1988년뿐 아니라 뒤이어 1989년에도 우리나라의 경제는 호황을 누렸고, 그에 따라 금융 분야에서도 활발한 거래가 이루어졌습니다.

이 당시 제가 근무하던 파리바 은행 서울지점은 전체 직원이 약 60~70 명 정도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저와 함께 일하는 자금, 외환, 자본시장을 담당하던 트레저리 (treasury)부서의 직원 숫자는 14~5명이었고, 업무용 차량을 담당하던 기사와 비서까지 포함하면 16~17 명에 달하는 조직이었습니다. 서울 지점 안에서 가장 인원수 비중이 컸고 비즈니스 볼륨도 가장 많았습니다. 수익도 물론 지점내 어떤 부서보다도 가장 많이 올렸습니다.

그 때에는 일도 많았고 고객들의 요구도 많아 수 많은 거래와 고객 주문 속에 묻혀서 살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힘들다고만 느꼈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1988년 즈음은 제게 황금기와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전형적인 제 일과를 회상해 봅니다.

아침 8시 즈음이면 사무실에 앉아 지난 밤에 유럽과 미국 시장에서 있었던 뉴스 거리와 시장 움직임을 살펴 봅니다. (그 당시에는 저의 어머니께서 생전에 계시던 시절이라 출근하자마자 어머니께 안부전화부터 먼저 드렸었습니다.) 오전 업무는 고객들과의 전화로 시작하여 의견을 교환하기도 하고 주문을 받아서 직원들에게 주문을 넘겨줘 거래를 성사시키기도 합니다. 점심 시간에는 거의 항상 고객들과 점심 약속이 있어 외출을 하였습니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면 다시 시장의 움직임 속에 묻혀 시간을 보냅니다. 오후 5시경 아시아 시장이 대체로 마무리 될 때쯤 지점장실로 가서 비즈니스와 시장 상황에 대하여 보고하고 필요한 사항을 건의합니다.

사무실에서의 일을 마치면 다시 고객들과의 저녁 약속으로 식사와 약간의 음주를 곁들입니다. 이렇게 하루 일과를 모두 마치면 대개 밤 12시 혹은 그보다도 더 늦은 시각이 됩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와 쓰러져 잡니다. 그런데 한 달이면 2~3번 혹은 더 자주 새벽에 뉴욕의 파리바 은행에서 전화가 옵니다. 거의 매일 저희 파리바 서울 지점에서 뉴욕 지점으로 주문을 넘깁니다. 그런데 시장 상황이 애매하거나 혹은 너무 갑자기 시장이 출렁이게 되면 뉴욕의 트레이더가 제게 전화를 하여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는지 제 의견을 구하는 것입니다. 잠결에 뉴욕의 트레이더가 기관총 쏘듯 쏟아 붓는 시장상황 보고를 들으며 저는 잠을 깨고 뉴욕 트레이더에게 ‘내가 사무실로 지금 나가서 바로 다시 전화할 테니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말고 내가 다시 전화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주섬주섬 옷을 입고 쏜 살 같이 차를 운전하여 사무실로 나갑니다. 사무실의 모니터를 지켜 보면서 한 쪽 벽면에 붙어 있는 칠판에 줄줄이 적혀 있는 서울 지점에서 뉴욕 지점으로 넘긴 주문들을 보면서 의사결정을 합니다. 그리고는 뉴욕 지점으로 전화를 걸어서 어떻게 할 것인지를 지시합니다. 이런 때가 대개는 새벽 2~3시경입니다. 때에 따라서는 이 보다 더 늦은 시각일 때도 있습니다. 한 번 이렇게 새벽에 사무실로 뛰어 나오고 나면 잠이 싹 깨어서 다시 잠을 청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다음 날 업무를 위하여 집으로 돌아가 잠시 눈을 붙이곤 하였습니다.

이런 날들을 참으로 많이 겪었습니다. 그 때에는 제 집사람이 제 건강을 염려하면서 밤에 잠도 제대로 못 자는 것을 몹시 걱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따금 그 시절을 돌아보며 빙그레 미소를 머금기도 합니다. 제가 젊은 시절에 그렇게 몸을 혹사하고서도 잘 버텨 주어서 고마웠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시절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 것이 한 편으로는 대견하기도 하였고 보기에 좋기도 하였다고 이야기합니다.

1988년에는 또 한 가지 기억에 남는 일이 제게 있었습니다. 제게 주어진 차량이 바뀌었습니다. 은행에서 제게 주어졌던 차는 처음에는 레코드 로얄이었습니다.  그런데 1988년 여름 파리바 은행 서울지점에서 콩코드라는 차를 매입하여 그 차를 제가 사용하였습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의 기아자동차에서 일본의 마즈다 자동차가 생산하여 미국에서 Mazda 525 라는 모델 이름으로 판매하는 차량 모델을 수입하여 조립, 생산하였습니다. 그 차의 이름이 콩코드였습니다.

1988년 당시의 우리나라 자동차 제조 기술의 현실을 보면; 우리나라 자동차 회사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모델보다는 외국에서 개발되고 수입하여 우리나라에서 조립한 모델의 품질이 더 좋았던 때입니다. 요즈음 우리나라 자동차 회사들이 직접 개발한 모델이 외국에 수출되고, 고급차 시장에서 외국의 자동차들과 경쟁하는 것을 보면 1988년과는 격세지감을 느끼게 됩니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1988년은 많은 사람들에게 특별한 해로 기억되기도 합니다. 저 또한 1988년에 있었던 남다른 기억들이 많았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지나간 시절이 좋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앞으로도 그 때 못지 않은 좋은 시간이 우리들에게 또 다시 올 것입니다. 그 때를 기다리며, 다시 한 번 우리나라의 경제가 일어서고 금융 시장이 살아날 수 있도록 다 함께 노력하여야겠습니다.

 
(차이나저널 게재일 : 2016년 1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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