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중국 지도자의 리더십

제정관 전 국방리더십개발원 원장

제정관 전 국방리더십개발원 원장

제정관(诸廷官 / JAE Jungkwan)

한중협회 리더십 경영 고문
韩中协会领导力经营顾问
Korea-China Association / Leadership Management Consultant

전, 국방리더십개발원 원장
(前)任青瓦台总统府秘书官
(前)任国防领导力开发院院长

저서 : 리더십 포커스(2006, 교보문고)
著书 ‘Leadership Focus(2006)’和 ‘领导力的哲学’ 等撰写多篇著作

진시황의 리더십 [제정관 교수의 중국 지도자의 리더십④]

작성자
제정관
작성일
2015-09-25 02:35
조회
41410

진시황(秦始皇, BC 259-210)


중국의 틀을 만든 진시황의 강력한 카리스마


[caption id="attachment_2961" align="aligncenter" width="230"]진시황의 상상도 진시황 상상도
출처 : https://zh.wikipedia.org[/caption]

 

현대 중국이 92%가 한족으로 통합되어 하나의 강력한 대륙국가로 웅비하고 있지만, 중국도 유럽처럼 동주시대, 선진(先秦)시대로 불린 춘추전국시대(BC 770-221)에는 지금의 유럽보다 더 잘게 쪼개져 있었다. 춘추시대 난립하던 제후국들은 100여 개국으로 통합되었고, 이어 전국시대에 이르러 '전국 7웅'이라 하여 연 · 제 · 진 · 초 · 조 · 위 · 한의 7개 제후국이 판도를 형성하였다.  BC 256년 진 소양왕이 주 난왕의 계획아래 합종한 6개국을 물리치고 주 황실의 명맥을 끊어버렸다.

주나라(BC 1046-256)는 중국 역사상 가장 확실한 기록을 가진 실질적인 최초의 왕조이자 가장 오래 존속한 국가였다. 790년간 존속하며 중국의 원형과 정신세계, 그리고 국가사회 질서의 기초를 확립했다.

이 주나라를 멸망시킨 진 소양왕이 훗날 진시황이 된 진왕(秦王) 정(政)의 조부이다. 진왕 정의 부친인 효문왕은 즉위 3일 만에 죽고 아들 政(나중의 진시황(秦始皇), 시황제, 진 시황제, BC 259-210)이 12살의 어린 나이에 31대 진나라 임금이 되었다.

진왕 정의 즉위 초기에는 여불위(呂不韋)가 자신의 첩인 조희를 뒤에 장양왕이 된 자초에게 아내로 삼게 하면서 재상이 되어 실정을 장악하고 국정을 전단했다. 조희와 자초 또는 여불위의 아들이 진시황이 된 것이다. 政이 누구의 아들인지는 확실치 않다. BC 238년 거행된 성인식은 진나라의 권력지형을 근본적으로 흔들며 진왕 정의 친정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고 차츰 강력한 군주의 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곧 조태후와 통정, 아들까지 2명이나 낳은 환관 노애의 반란을 침착하게 진압하면서 그 추종세력 척결과 더불어 여불위까지 자결케 하였다.

 

이 여불위는 3천여 명의 빈객을 활용해 총 26권 160편의 방대한 '여씨춘추(呂氏春秋)'라는 백가사전을 편찬하고, 자신을 잡가(雜家)의 대표적인 사상가로 여겨지도록 사전을 한자도 고칠 필요가 없는 '뛰어난 글'로 작품을 만들었으며, 국가의 재원을 튼튼히 한 인물이다.

진왕 정은 현신들과 명장들을 적재적소에 비범하게 활용하였다.

특히 여불위가 발탁한 이사를 중용하여 한비의 법가사상을 활용해 실리주의에 입각한 부국강병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중국대륙을 모두 정복하겠다는 확실한 꿈을 품고 선대 군주들과 여불위가 확보해 놓은 넉넉한 재정에다 농업을 진흥하여 식량과 물자를 충분히 확충하는 한편, 군사력을 막강하게 기른 후 전면적인 정복사업에 나섰다.

BC 230년 내사등이 이끄는 8만 강병으로 가장 약한 한나라부터 공략을 시작하여, 왕전을 앞세운 조나라 정복, 왕전의 아들 왕분의 수공에 의한 위나라 멸망과,  BC 223년 왕전의 주장대로 60만 대군을 지원, 초나라를 멸망시켰다. 이어 연나라(BC222)를 정복하고, 마지막 남은 제후국인 제나라를 BC 221년에 멸망시켜 중국대륙을 통일하였다.

각국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이사(李斯)와 울료자 등의 이간계(離間計)를 무력과 더불어 잘 활용하였다. 비정규전에도 매우 탁월했던 것이다.

550년 동안 이어온 춘추전국시대를 겨우 10년 만에 마감하고 중국 역사상 최초의 통일을 이루어 낸 것이다. 중국통일의 대업 완수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중국 역대 군주들의 치적가운데 가장 으뜸이라 할 수 있다. 힘을 키워 다른 나라를 멸망시키고 진 영토를 확장한 이 통일이 후대로 갈수록 중국이라는 영역의 기본 공간으로 설정된 것이다.

 

사실 중국은 외세 이민족에 대해 현대 중국 이전까지는 중국 민족의 일원이나 중국사의 일부로 여기지 않았으며 철저하게 배척했다.

진나라도 원래는 북방세력의 한 갈래인 융족(서융)의 나라라 하여 중원의 일원이 아니라 오랑캐 나라로 여기는 기류가 역력했고, 진왕 정이 모든 국가를 무력으로 정복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이러한 위업을 달성한 원동력은 진왕 정의 강력한 리더십과 추진력이었다. 자신의 지도력 안에 모두를 결집시키는 한편 뛰어난 인재들의 기용과 활용, 충분한 재정기반의 확충, 철저한 준비, 월등한 군사력의 육성, 적국들에 대한 정보와 내분의 활용, 순차적 전략목표설정과 재빠른 작전 실행 등이 탁월하였다. 그의 강력한 카리스마와 그에 바탕을 둔 추진력이 성공의 핵심이었다.

 

진시황은 BC 221년 38세의 나이로 역사상 최초의 통일제국인 진나라(진 BC 900년경- 206, 진 제국 BC 221-06)를 세우게 되자 왕이란 호칭을 바꿔 황제로 자칭하였다. 자신을 최초의 황제라 하여 '시황제'로 지칭했고 자신이 지배하는 세계를 제국이라 하였다.

법가 이론에 입각하여 무엇보다 확고하고 강력하게 자신에 의한 1인 직접 통치체제를 제도화 했다. 북방 세력의 기마술을 도입하여 막강한 군대를 갖춤으로써 군사력을 정비하였다. 주나라의 봉건제와 달리 군현제를 실시하여 전국을 36군과 1400여개의 현으로 체계적으로 편성하고 중앙에서 태수와 현령을 직접 내려 보내 과거 그 누구도 시도하지 못했던 거대한 규모의 중앙집권제를 확립하였다. 그리고 흉노를 비롯한 북방세력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기도 했다.

진시황은 제국의 통합을 위해 정치 ․ 군사 ․ 행정은 물론이고 모든 방면에 걸친 법 ․ 제도의 개혁을 단행했다. 각 지방과 제후국들 간에 달랐던 문자, 화폐, 도량형, 바뀌 크기 등을 통일하였다.

전국의 서로 다른 문자체와 발음을 정리하여 전서(篆書)로 통일하여 쉽게 소통할 수 있는 한자문화가 확립되었다.

화폐도 둥근 원에 네모난 구멍을 낸 엽전인 반량전으로 통일하여 이후 중국 화폐의 원형이 되었다. 길이 ․  부피 ․ 무게 등을 재는 도량형까지 하나의 기준으로 통일하여 사용하도록 했고, 당시 이동 운송수단이던 수례의 바퀴 크기를 6척으로 통일했다. 치도(馳道)라는 도로를 만들고 가로수를 심어 양질의 도로망을 갖추게 되자 교통과 교역이 발달하게 되었다. 특히 진시황은 스스로 중국 전역을 순행하면서 현지를 직접 확인하면서 통일사업 강도를 다져나갔다. 청나라 강희제 ․ 건륭제의 내순이나 현대 중국 등소평의 남순강화도 진시황에서 유래되었다.

 

BC 213 진시황은 진나라에 대한 반감과 비판이 성행하고 일부 세력이 전대의 봉건제를 주장하자 조정에 공론을 부쳐 정부에 비판적이던 지식인 460명을 희생양으로 삼아 매장형에 처했으며, 실용서인 농업, 의학, 점책과 법령만을 예외로 하고 모든 기록과 시경·서경 그리고 제자백가의 책을 거두어 불태웠다. 그러나 이 분서갱유는 오랜 전란을 끝내고 통일국가를 건설해 나가는 과정에서 변화를 거부하고 과거지향적인 형태에 강력한 제동을 걸 필요를 절감하여 본보기로 해당 유학자와 그 생각이 담긴 서적을 응징한 것이다. 수만, 수십만 명이 전사하거나 처형되던 당시의 사정에 비추어보면 딱 한번 460명의 도사와 유학자들에게 자행된 조치는 개혁 반대세력에 대한 경고 조치였다.

제주도 서귀포시의 서복공원이 말해주듯이 불로장생의 명약을 구해오겠다고 선남선녀 수천 명을 데리고 한반도로 탈출한 방사 서복(徐福)의 이야기는 사람의 한계를 넘어 불노불사 만세까지 제국을 다스리겠다는 진시황의 엉뚱한 생각을 나타내기도 했다.

 

[caption id="attachment_2960" align="alignleft" width="300"]진시황의 병마용 진시황의 병마용
출처 : https://zh.wikipedia.org/[/caption]

한편으로 곳곳에 잔존하던 지방 군사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어마어마한 대역사를 벌여 수많은 인력을 동원했다. 대략 만리장성에 150만 명, 여산릉에 75만 명, 아방궁에 70만 명, 영남개발과 도로공사에 50만 명을 끌어 모아 역사를 완성하였다. 이 과정에서 과중한 노역과 조세부담, 가혹한 법과 형벌, 그리고 집행과정에서 진나라 관리와 군인들의 무자비한 횡포가 있었다.

강력한 법치와 무자비한 무력통치의 결과로 탄생된 이 축조물들이 오늘날 중국의 귀중한 관광 자원으로 각광을 받고 있음은 역사의 오묘함이라 할 수 있다. 진시황은 오직 진 제국을 통일대국으로 건설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그러다가 BC 210년에 49세의 나이로 전국 순행 중에 갑작스런 병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진시황이 죽자 BC 209년 중국 역사상 최초의 농민반란인 '진승 · 오광의 난'을 시발로 전국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그중 초나라의 항우와 한나라의 유방이 이때 봉기하여 숱한 세력들을 통합하여 수도인 함양을 함락함으로써 진나라는 겨우 15년 만인 BC 206년에 멸망했다.

 

진시황은 창업에는 성공했으나 수성에서는 실패했다고 할 수 있다.

오직 대제국 건설을 염두에 둔 포악한 성정과 통치로 민심을 잃었고,

후계구도 확립 또한 실패한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 외부의 그에 대한 높은 평가는 그의 인간성이나 처세보다 중국의 엄청난 체제 변화와 중화제국의 틀 형성에 초점을 두고 있다.

지금 중국을 표기하거나 말할 때 진시황의 진나라에서 유래한 '차이나(China)'를 쓰고 있음은 이를 웅변하고 있다. 또한 오늘날 중국의 상징이라면 만리장성, 진시황릉과 병마용갱, 자금성을 꼽는데, 자금성을 제외하고는 모두 진시황와 연관되어 있다. 진시황과 진나라를 뺀 중국을 상상할 수 없고, 진시황으로 인해 중국 세계와 중국 대륙이 형성되어 지금의 중국이 존재하게 되었다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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