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중국 지도자의 리더십

제정관 전 국방리더십개발원 원장

제정관 전 국방리더십개발원 원장

제정관(诸廷官 / JAE Jungkwan)

한중협회 리더십 경영 고문
韩中协会领导力经营顾问
Korea-China Association / Leadership Management Consultant

전, 국방리더십개발원 원장
(前)任青瓦台总统府秘书官
(前)任国防领导力开发院院长

저서 : 리더십 포커스(2006, 교보문고)
著书 ‘Leadership Focus(2006)’和 ‘领导力的哲学’ 等撰写多篇著作

강희제의 리더십 [제정관 교수의 중국 지도자의 리더십③]

작성자
제정관
작성일
2015-09-07 12:44
조회
41713

강희제(康熙帝, 1654~1722)


중국 최고의 황제 강희제


  • 본명 : 애신각라현엽(愛新覺羅玄燁))

  • 재위 : 1661년 ~ 1722년


[caption id="" align="alignnone" width="240"] 강희제(康熙帝)(사진=위키백과)[/caption]

 

강희제는 좋은 인품과 뛰어난 지도력에다 백성을 아끼고 살기 좋게 만들어 진심어린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뒤를 이은 옹정제(1722-35)와 건륭제(1735-96)에 이르기까지 무려 135년에 걸친 중국의 강옹건 전성시대를 지속하도록 한 황제이다.

 

강희제는 인류문명사를 통틀어 손꼽을 수 있는 명군으로 전혀 손색이 없다. 우마르, 칭기즈칸, 세종대왕, 쉴레이만 대제, 악바르, 표트로 대제, 링컨 등 뛰어난 군주, 위대한 지도자들을 넘어서는 지도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국사에서도 가장 길고 전무후무한 최고의 전성시대를 열었을 뿐 아니라, 오스만 제국의 메메드 2세 이후 4세까지(1451-1693), 인도 무굴제국의 악바르 이후 아우랑제브(1556-1707) 때까지의 치세와 더불어 인류역사상 가장 긴 황금시대를 구가하였다.

 

중국에서는 청나라 멸망 뒤에 '만주족의 나라'라 하여 큰 반감을 가졌으며, 모택동도 반청 입장에서 타도활동까지 벌였다. 그러나 현대 중국의 성립 이후에는 모택동조차 만주족의 역사를 중국사의 일부로 삼고 청나라의 계승자로 자처하면서 강희제를 중국 최고의 성군이자 명군으로 '천년에 한명 나올까 말까한 황제'로 평가하고 있다.

인품과 자기관리, 힘과 세력 키우기, 용인술과 조직관리, 국력의 확장과 발전  전반에 걸쳐 완벽한 리더십 본보기가 된 황제이다.

 

특히 오랜 군주로 있으면서도 마지막까지 초심을 잃지 않고 훌륭하게 국정을 이끌었다는 점과, '진정으로 화평을 원하는 것을 아는 순간 적은 화평을 내세우지 않는다'는 평범한 진리이자 상식을 전략적 원칙으로 삼고 필요하다면 군사적 대결과 전쟁을 마다하지 않은 위대함이다.

이는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는 현대적 전략사상과 같다.

 

강희제는 순치제(재위1643-61)의 3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책을 즐겨 읽었고 암송과 이해에 뛰어났다. 승마와 활솜씨가 뛰어났으며, 아침 8시부터 저녁 8시 까지 부지런히 공부하였고, 아침 문안 인사를 철저히 하여 1660년 6세의 나이로 황태자가 되고 7세에 황제가 되었다. 13세가 되자 성인식·정식 즉위식을 올리고 친정을 시작했다.

강희제는 백성을 섬기는 리더십을 근간으로 삼고 군주는 본보기가 되어야 함을 간파하고 실천하였다. "'국궁진력(鞠躬盡力)'즉 몸을 낮춰 온 힘을 다한다', '안거낙업(安居樂業)' 즉 백성을 편안하게 살게 해 주고 즐겁게 일하게 한다"를 좌우명으로 삼고 몸소 검소한 생활을 실천했다.

 

황제가 되자 명나라 때 10만 명이나 되던 환관과 궁녀를 400명으로 줄이고, 유지비용도 1/40로 절감하였다.

강희제는 권력기반을 다짐에 있어 큰 산을 슬기와 인내로 극복하였다.

시세를 읽고 준비한 뒤 때가오면 과감한 승부수를 던졌다.

만주 제일 용사로 불리던 개국공신이자 보정대신이며 병권을 쥔 실권자였던 오베에게 사약을 내려(1669) 첫 번째 산을 넘었다. 남방의 3번의 난(1673-81) 오삼계의 9년에 걸친 반란을 수습(1681)한 것이 2번째 산이었고, 한족의 잔존세력인 대만을 소탕하여 역사상 최초로 중국에 속하게 한 것(1683)이 3번째 산이었다. 러시아와 전략적 ․ 실리적 협상을 통해 현재의 국경이 된 북방경계선을 확정함(1689)으로써 4번의 큰 산을 넘었다. 동진과 남하를 거듭한 러시아를 저지한 것이다. 중국이 대등한 입장에서 상대방의 주권을 존중하며 조약을 맺은 것은 한족이 아닌 만주족의 정복왕조이자 강희제라서 가능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강희제는 몸소 8기군을 이끌고 고비사막을 넘어 몽골을 원정(1720)하여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몽골과 티벳의 일부를 영토로 삼으면서 5번째의 마지막 강력한 산을 넘었던 것이다.

강희제를 중심으로 한 지배층의 상무정신과 무인적 기질이 마지막 몽고까지 정벌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내치 면에서는 한족을 우대하고 생활습관이나 문화를 존중하면서도 결코 동화되지 않고 만주족의 정체성과 전통을 지켜 황금치세가 가능하게 했으며, 만주족의 지배권을 건드리면 가차 없이 척결하였는데 이러한 전략적 원칙은 강웅건 3대에 거쳐 일관되게 적용되었다. 이는 국가적 정체성과 체제 강화라는 가장 기본적 원칙에 충실함으로써 안정적 지배 권력을 유지하는 국가전략의 핵심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강희제는 지배권 다음으로 국가운영의 근간이 재정에 있음을 잘 간파하였다. 세금과 공물은 되도록 줄이고, 국가운영은 근검절약하는 한편 활발한 무역을 통해 막대한 은이 청나라로 유입되도록 하였다.

비단, 차, 도자기를 유럽으로 수출하면서 1710년에는 5천만 냥이 넘는 은자가 쌓였을 정도였다.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하여 치수를 국치의 근본으로 생각하고 곡창지대를 중심으로 7년에 걸쳐 근본적인 치수사업을 벌였으며 강소성 일대의 치수를 위해 운하공사를 병행하여 화물의 원활한 수송이 가능토록 하였다. 강희제의 정치에 힘입어 백성들의 삶이 나아지자 인구가 명나라 멸망시 1억이던 인구가 강희제가 죽었을시 1억 5천만 명으로 늘어났다.

 

강희제는 학문을 중시하고 독서를 즐겼다. 특히 중국의 사상계는 물론이고 중국인의 정신세계와 일상생활을 지배하던 유학을 최대한 활용하였다. 군주의 지배권과 중앙집권제를 옹호하는 한편 백성을 교화시키는 데 유용했기 때문이다. 서양학문도 가까이 하여 유학의 약점인 입으로만 말하는 것을 경계하였다. 황제의 통치권을 강화함과 더불어 신료들이 소신을 가지고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

 

강희제는 현대 국가지도자들이 가져야 할 리더십의 모든 핵심을 모두 갖추고 실천한 위대한 황제였던 것이다. 1717년에 미리 쓴 유서격인 '고별상유(告別上諭)'에도 현대적 리더십 개념의 진수가 다 담겨있다.

"천하를 다스림에 있어 능력 있는 사람을 가까이 두고, 백성들의 세금을 낮춰주며,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합쳐내야 한다. 나라에 위기가 발생하기 전에 예방하고, 혼란이 생기기 전에 미리 파악해 잘 다스리며, 관대함과 엄격함의 조화를 이뤄 나라를 위한 장구한 계획을 도모해야 한다".

인재를 발굴하고 대우하여 적재적소에 쓰며, 조세정책을 잘 하며, 국론을 통일하여 국가적 효율을 높인다. 위기발생 전 사전 예방시스템을 잘 갖추고 위기발생 시 위기관리 능력이 잘 작동되어야 한다. 국가기강이 바로 선 가운데 각계각층의 의견이 모아져 생산적으로 작동하며,

항상 장·단기 국가의 백년대계를 도모해 나가야 함을 의미한다.

 

현대 중국이 광대한 영토를 확보하고 세계를 주도해 나가는 이면에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로 불릴 수 있는 강희제의 리더십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중국의 국경선이 강희제 때의 국경선과 거의 차이가 없음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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