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중국 지도자의 리더십

제정관 전 국방리더십개발원 원장

제정관 전 국방리더십개발원 원장

제정관(诸廷官 / JAE Jungkwan)

한중협회 리더십 경영 고문
韩中协会领导力经营顾问
Korea-China Association / Leadership Management Consultant

전, 국방리더십개발원 원장
(前)任青瓦台总统府秘书官
(前)任国防领导力开发院院长

저서 : 리더십 포커스(2006, 교보문고)
著书 ‘Leadership Focus(2006)’和 ‘领导力的哲学’ 等撰写多篇著作

제갈량의 리더십(상) [제정관 교수의 중국 지도자의 리더십⑤]

작성자
사무국
작성일
2017-02-17 03:13
조회
12382


제갈량(诸葛亮, Zhuge Liang, 181년-234년)


 

[caption id="" align="alignnone" width="200"]诸葛亮 제갈량(이미지=위키백과)[/caption]

 

제갈량은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모신(謀臣)으로, 자는 공명(孔明)이며 후한 말 유비(劉備)를 도와 촉한(蜀漢)을 건국하였다. 유비가 제위에 오르자 승상에 취임하였고, 유비 사후 유선(劉禪)을 보좌하여 8년 동안 5차에 걸쳐 지속적인 북벌을 단행하여 위(魏)나라를 공략하였다.

234년 5차 북벌 중 오장원(五丈原) 진중에서 54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중국 역사상 지략과 충의의 전략가로 추앙을 받고 있다. 그가 유선에게 올린 출사표(出師表)는 충신들의 가슴을 울리는 명문으로 손꼽히고 있다.

현세에 만연된 잘못된 가치관, 정치적인 혼란과 경제적인 어려움, 사회 지도급 인사들의 도덕적 해이로 존경받는 지도자와 리더십이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는 이 때, 그 해답을 줄 수 있는 인물이 바로 제갈량이다.

제갈량은 원칙에 충실한 리더로서 인재 기용에 도덕성을 제일 중시하였다. 유비의 삼고초려로 27세에 만나 오장원에서 죽을 때까지 27년간 한실의 회복과 천하통일이라는 일관된 신념으로 충의를 지키며 변절하지 않았다.

또한 정책에 책임을 지고 신상필벌과 믿음을 근본으로 과감한 개혁정책을 단행하여 백성들을 잘 살게 하였으며, 국토를 넓힌 후 포용과 화합의 리더십을 발휘하였다.

촉의 모든 실권을 쥐고 있었음에도 남긴 재산은 뽕나무 800그루와 거친 땅 15고랑이 전부였다. 무덤 크기는 관이 들어갈 정도로 하고 염할 때는 평소의 옷을 쓰라고 하여 마지막 까지 검소함을 잃지 않았다.

그의 이런 청렴함과 검소함은 촉의 수많은 신하들에게 영향을 미쳐, 강유, 등지, 비위 등의 명신들이 그 정신을 어어 나갔다. 무능한 유선을 충의로 끝까지 보좌하면서 사심 없이 도덕과 원칙을 바탕으로 투명한 정치를 한 탁월한 리더였다.

 

그의 리더십을 구분해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도덕성을 우선하고 확고한 신념을 지키는 리더십이다.


조조는 능력을 최우선으로 사람을 뽑았지만 제갈량은 출사표에 잘 드러난 바와 같이 ‘충성되고 선한 일을 행한 자’, ‘진실되고 뜻과 헤아림이 충성되며 순수하다’, ‘성품과 행함이 맑고 고르며’ 등의 표현에서 능력 못지않게 도덕성을 중시하였다.

그래서 인재부족의 곤란도 감수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가 발탁 중용한 장완, 비위, 강유, 동윤 등은 한결같이 도덕성을 갖춘 인물들이었다.

반면 조조의 휘하 인물들인 정욱, 동소, 곽가, 사마의 등은 갖가지 폐단과 문제를 일으켰다.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조조의 인재 기용방식이 부른 결과였다.

공명의 일생을 축약하면 ‘한실의 회복과 천하통일’을 위해 바친 삶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와 같은 난세에서 공명이 보여준 지조와 절개, 신념은 빛을 발한다. 한 인간으로 도덕성과 신의를 저버리지 않은 채 평생 신념을 위해 살아간 그의 불같은 열정이 감동을 준다.

그는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에 묘사된 것처럼 비바람을 부르는 도사가 아니었다. 고뇌하고 괴로워하며, 실수도 저지르면서도 불같은 신념과 굽힐 줄 모르는 의지와 흔들림 없는 지조로 한평생을 불사르다 간 인간이었던 것이다.

 

둘째, 정책에 책임을 지고 신상필벌을 확실히 하였다.


가정을 잃고 한중으로 돌아온 공명은 명을 어기고 패전을 자초한 책임을 물어 그토록 아끼던 마속을 참수(泣斬馬謖)하고 승상인 자신의 벼슬을 삼 등급 낮추어 우장군으로 깍아 내렸다. 이때 마속은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편지를 공명에게 썼고 이를 본 10만 장병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신상필벌에 대한 공명의 생각은 확고하다. ‘상은 공평하지 않으면 안 되고, 벌은 고르지 않으면 안 된다. 어느 때 상을 받는지를 알면 용감한 자는 사력을 다할 줄 알고, 어느 때 벌을 내릴 줄 알면 사악한 자는 두려워 할 줄 안다’.

자기의 손발과 같은 인물도, 지위가 높은 자라도 예외를 두지 않았다. 이엄과 같은 중신도 군량조달 임무를 제대로 못하고 허위보고 하자 벼슬을 박탈하고 평민으로 귀양을 보냈다.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고, 속된 벼슬아치만 쓴다고 인사정책을 엉뚱하게 비판한, 유비가 총애한 요립도 평민 신분이 되어 쫓겨났다.

그러나 연좌제 따위는 쓰지 않았으니 이엄의 아들 이풍은 관직도 그대로 두고 글을 써서 타일러 감복시켰다. 이렇듯 예외가 없는 공명의 엄격한 법 집행이 있었기에 촉은 삼국 중 가장 열세한 국력을 가지고도 위나라를 대적할 수 있었다.

또한 믿음을 기본으로 예측 가능한 리더십을 발휘하였다. 부대 교대를 앞둔 상황에서 적이 공격해 와 상황이 어려워도 군사들과의 약속을 우선하여 그대로 시행하려하자 군사들이 스스로 교대를 마다하고 전의를 북돋아 싸우기를 원하였다.

이렇듯 공명은 촉의 백성과 군대에게 철저히 믿음을 주는 리더십을 발휘하였다. 벌을 받고 쫓겨난 이엄조차도 공명이 죽자 오히려 한탄하며 병으로 죽었다. 자신을 인정해줄 능력이 있는 참 지도자가 없어진 것을 한탄한 것이다.

 

셋째, 철저히 준비된 리더십으로 비전을 제시하였다.


공명은 양양성 밖 20리 쯤 떨어진 융중에 은둔하여 낮에는 농사짓고 밤에는 책을 읽으며 10년여의 세월을 보냈다. 농부이지만 틈만 나면 당대의 명사들을 찾아가 가르침을 청했고 당시에 전란을 피해 운집한 형주 일대의 준걸들, 선비들과 교류했다.

그중 식견이 높은 방덕공과 사마휘도 있었다. 공명이 융중을 나서자마자 전략가로서, 외교관으로서, 탁월한 정치가로서 종형무진 활약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의 선천적인 재능과 더불어, 모여든 명사들과 교류하며 수집한 정보와 지식이 바탕이 된 것이었다. 이 시기에 지은 양부음(梁父吟)은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공명이 유비를 만나 제시한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의 핵심은 형주와 익주를 차지한 다음 손권과 연합하여 조조에게 맞서겠다는 것이었는데, 이는 당시의 정세를 꿰뚫어보는 탁월한 전략이었다. 조조에게 거듭 패하여 쫓기다 유표에게 의지하고 있던 유비에게는 더없는 비전의 제시였다. 공명이 구체적인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여 내놓은 현실적인 청사진이자 나침판 같은 구실을 한 것이다.

공명은 이 계략에 따라 손권과 연합하여 남하하는 조조를 막아냄으로써 누란의 위기에 빠진 유비를 구함은 물론 형주, 익주를 손에 넣어 일약 조조, 손권과 나란히 할 수 있는 위치로 올려놓았다.

 

넷째, 제갈공명의 탁월한 국가경영 능력이다.


익주를 차지해 겨우 근거지를 마련해 출발했지만 위·오·촉의 국력 차는 대략 6:3:1정도였다. 위나라의 호구 수는 66만 2,400여 호에 인구는 443만여 명, 오나라는 호구 수 52만 3,000 호에 인구 230만여 명, 촉은 호구 수 28만에 인구 94만여 명 정도였다. 후일 경제적 혼란기에 촉의 모든 실권을 넘겨받은 공명은 경제난도 극복하고, 북벌도 성공시켜야 하는 이중의 과제를 떠맡게 되었다.

공명이 먼저 착수한 것은 ‘경제 살리기’였다. 그는 염부교위(鹽府校尉)를 두고 소금과 철의 이익을 국가가 직접 관리하도록 하였다. 그런 다음 남만을 토벌했는데, 북벌을 위해 남쪽의 화근을 없애면서 남방의 구리를 확보하여 전(錢)을 주조하여 국부를 키웠다.

그리고 이 지방에서 군수용 말을 취함으로서 수송수단을 확보하였다. 아울러 남해에 이르는 바닷길을 개척하여 해상교역의 활로를 열었다.

군량 공급과 더불어 민중의 생업을 생각했던 공명은 병사를 나누어 둔전을 하며 백성과 함께 거주시켰는데 백성들은 편안히 살았고 군사들은 사사로이 행하는 일이 없었다.

익주의 사치풍조를 개혁하기 위해 ‘윗물부터 맑게’하는데 초점을 두었고, 형주 명사 사마휘의 제자 윤묵과 같은 선비를 권학종사로 임명하여 쇠잔해진 익주의 학업을 다시 일으키고자 하였다.

공정한 법 집행을 위해 익주의 엘리트들을 모아 ‘촉과(蜀科)’라는 법을 만들었다. 공명이 국가경영을 위한 개혁에 성공한 것은 유비의 집권 초기를 놓치지 않았던 철저한 준비성, 강력한 의지와 힘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다섯째, 통합과 화합의 리더십이다.


유비 진영의 인물들은 그의 삶의 궤적만큼이나 복잡하고 다양했다.

관우와 장비, 공손찬 진영에서 넘어온 조자룡, 서주 시절에 얻은 미축 ·미방 · 손건, 형주에서 합류한 마량· 간옹 · 진진 · 이적, 남쪽 사군에서 얻은 황충과 위연, 익주에서 가세한 이엄 · 법정 · 황권, 서량에서 투항해온 마초와 마대, 노숙의 천거로 기용된 방통 등 실로 복잡 다양했다.

이들 군상들을 모두 자기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도록 만들었고, 그 누구도 패거리를 만들거나 반란을 꿈꾸지 않았는데, 이것은 바로 공명이 보여준 통합의 리더십 때문이었다. 결코 어느 집단에 치우치지 않고 모두 똑같은 기준을 적용하였다.

유비가 한중왕이 되자 별로 공이 없는 허정 같은 인물의 직위가 공명의 자리인 군사장군(軍師將軍)보다 위였지만 명망 있는 인물을 기용하기 위해 자리에 개의치 않았다. 이러한 노력으로 제한된 인재들만으로 오를 견제하고 위나라를 공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남만 정벌 시 온갖 고난을 겪으며 맹획을 일곱 번 잡아 일곱 번 놓아준 끝에 진정한 항복을 받아낼 수 있었다. 남만을 토벌한 후 관리도, 군대도 주둔시키지 않고 그들을 끌어안았던 것이다.

공명의 이러한 처사에 감동한 나머지 맹획은 그가 통치하는 동안 다시는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고, 촉군이 북벌 길에 오를 때마다 엄청난 자원을 공급하면서 도리어 공명을 존경했다. 진정한 통합의 리더십이 엄청난 전력을 창출한 것이다.

(하편에서 이어집니다...)

 

차이나저널에서 보기 : http://chinajournal.kr/2017/02/17/38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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