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중국 지도자의 리더십

제정관 전 국방리더십개발원 원장

제정관 전 국방리더십개발원 원장

제정관(诸廷官 / JAE Jungkwan)

한중협회 리더십 경영 고문
韩中协会领导力经营顾问
Korea-China Association / Leadership Management Consultant

전, 국방리더십개발원 원장
(前)任青瓦台总统府秘书官
(前)任国防领导力开发院院长

저서 : 리더십 포커스(2006, 교보문고)
著书 ‘Leadership Focus(2006)’和 ‘领导力的哲学’ 等撰写多篇著作

제갈량의 리더십(하) [제정관 교수의 중국 지도자의 리더십⑤]

작성자
사무국
작성일
2017-02-17 13:50
조회
13160

제갈량(诸葛亮, Zhuge Liang, 181년-234년)


 

[caption id="" align="alignnone" width="200"]诸葛亮 제갈량(이미지=위키백과)[/caption]

 

(상편에서 이어집니다...)


여섯 째, 인간경영의 탁월함이다.


 

먼저 내부를 잘 단합시켰다. 관우와 마초가 서로 자신의 우위를 내세우면 진영의 안정이 깨질 수도 있었는데, 관우가 공명에게 마초의 인품과 재능을 물었을 때, ‘마맹기는 문무를 겸비했고 능력은 보통 사람을 뛰어 넘으나 미염공(관우)의 절륜함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라 하여 마초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관우의 자존심을 지켜주었다.

신하들이 서로 반목하는 것을 막기 위해 각별한 정성을 기울였다. 누구의 편에도 서지 않고 공평하게 대하였다. 그러나 내부 반목을 막기 위해 다독거리지만은 않았다.

 

유비에게 인정받아 교만하고 오만한 팽양을 유비에게 간하여 내쳐버렸다. 공명은 자신의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는 이엄(李嚴)에게도 리더로서의 공평무사한 태도를 견지하였으며, 반목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유비의 신임이 깊었던 법정(法正)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서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공의를 위함에 있어서는 서로 의지했다.

이렇듯 내부 반목을 막고 단결을 위한 노력으로 촉의 내부에서는 그 어느 국가보다도 이탈자와 분열이 없었다. 가슴으로 호소하고 솔선수범하는 노력들이 내부의 감동을 이끌어 낸 것이다.

 

공명은 인재를 소중히 여겼다. 익주를 차지한 후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은거하려는 두미(杜微) 같은 대표적 인물을 구구절절한 편지를 포함한 갖은 정성으로 감동시켜 참여하게 하였다. 유능하고 덕망 있는 인물을 끌어오기 위한 공명의 노력은 초야는 물론 타국에 까지 미쳤다. 오나라에 붙잡힌 장예는 잊혀진 인물이었지만 그의 실무능력을 기억하고 있던 공명은 유비 사후 외교적 교섭으로 끝내 찾아와 중용했다.

 

특히 능력 있는 인재를 중시했는데, 뛰어난 두뇌에 넓은 식견을 지닌 초주는 키가 8척이나 외모가 매우 초라하여 모두들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 오직 능력만을 인정하여 주위를 물리치고 발탁하였다. 패전의 책임을 물어 마속은 처형했지만, 그의 예하 장수 왕평에게는 올바른 주장을 폈다는 점을 인정해 승진시켰다. 손권이 외모가 추하다고 방통을 놓친 사례나 조조가 장송을 외모로 판단해 내쫓아 익주를 차지할 절호의 기회를 놓친 사례를 보면 오직 능력과 도덕성에 입각한 공명의 사람 씀이 크게 돋보인다. 발탁하면 믿음과 칭찬으로 사람을 키웠다.

 

유비가 죽자 오나라와의 동맹을 복원시킴에 있어 자신이 발탁한 등지에게 전권을 내맡겨 성공시켰다. 공명으로부터 믿음을 얻은 인물들은 전쟁터에서 외교전선에서 또는 행정에서 각자의 능력을 맘껏 발휘했던 것이다. 공명은 믿음을 주는 방책으로 ‘칭찬’을 하였다. 여러 형태로 능력 있는 인물을 칭찬하고 격려하며 자신의 믿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공명은 할 말은 하는 사람, 바른 말 하는 사람을 중용하였다.

관우가 형주에서 죽자 유비는 대군을 일으켜 오나라에 복수하려 했다. 이때 진복이 시기가 적절치 않음을 내세워 반대한 결과 유비의 미움을 사 감옥에 갇혔고 벼슬을 잃고 야인이 되었다. 그러나 훗날 공명은 진복을 발탁하여 중용하였다.

동화는 청렴하기도 하지만 바른 말을 하는 강직한 성품이었는데 공명은 그를 크게 칭찬하였다. 벼슬아치들의 바른 말을 서슴지 않고 할 수 있는 풍토를 조성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풍토에서 사심 없는 인재선발과 천거가 이루어진 것이다.

공명이 죽자 유선은 황호를 곁에 두고 ‘듣기 좋은 말’만 들으며 귀를 막고 눈을 가려 결국 멸망의 길로 들어섰다. 아첨군이 조직과 국가를 망가치는 것이다.

 

공명은 제한된 인재들을 적재적소에 기용하려고 정성을 기울였다.

강직하고 검소한 동화를 등용하여 익주의 기풍을 쇄신했고, 곧은 성품의 동윤을 유선 곁에 두어 임금의 향락을 막았다. 변론에 능한 진복을 발탁하여 오나라의 사자 장온을 맞아 감탄케 했으며, 감독능력이 뛰어난 여예를 기용하여 군량미 공급의 책임을 맡겼다. 상총에게는 군사의 일을, 실무 처리 능력이 있는 장예에게는 참군의 직책으로 군대 행정을 맡게 했다. 장점과 단점을 고려, 인물들이 기량을 발휘하도록 한 것이다.

 

위연은 당당하고 자신에 넘치고 용맹하였으나 공명을 겁쟁이라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공명은 도덕적으로 큰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는 위연의 그런 말에 노하지 않고 능력을 높이 평가해 싸움터에 앞장세웠다. 관우에게 발탁된 양의의 경우 능력이 있으나 속이 좁아 사람들과 화합하지 못했다.

그러나 군대 편성과 군수물자 계산에 탁월한 그를 중용하여 후방의 일을 맡겼다. 이렇듯 각 분야에 맞는 적임자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한 가지 일을 맡겨 재능이 어디 있는 지를 파악한 후에야 비로서 중용했다. 공명의 리더십은 빈약한 촉의 인적자원의 활용을 최대한으로 하였고 그 결과 상대적으로 풍부한 인재를 갖춘 위나 오와 맞설 수 있었다.

 

방통을 유비에게 천거했으나 알아보지 못하고 현령이란 말직을 주자 방통이 술만 먹다가 쫓겨났는데, 공명이 그가 인재이며 학문도 공명자신보다 10배나 낫다고 다시 강력 추천하여 공명과 같은 군사중량장으로 삼게 했다. 방통에게 공을 세울 기회를 주기 위해 익주를 점령토록 했는데, 도중에 죽었을 때 가장 슬퍼한 사람도 공명이었다.

형주 야인 유파는 유장에게 유비는 영웅이니 필시 해가 될 것이라고 늘 유비의 반대편에 섰지만 익주 점령 후 공명은 오히려 유파를 칭찬하고 천거하여 좌장군으로 삼게 했다. 원수였으나 그의 명성과 능력을 알고 천거했던 것이다. 공명은 라이벌이나 원수라도 사심 없이 발탁하고 천거하는 인간경영을 했던 것이다.

 

공명의 포용력은 실로 바다와 같이 넓었다. 유염은 유비에게 발탁되어 승진을 거듭하여 도향우의 자리에 올라 이염과 어깨를 견주었다.

그는 자신이 황족의 성임을 내세워 사치를 즐기고 승상인 공명을 풍자하는 등의 행위만 일삼으며 문제를 일으켰다. 사이가 나쁜 위연을 모함하다 드디어 공명의 처벌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사죄하자 너그럽게 용서하였는데, 이후 공명의 포용력에 대한 감사로 새로운 각오를 다짐하고 정진하였다. 잘못을 처벌하되 진심으로 뉘우치고 사죄하면 너그럽게 포용하는 것이 공명의 인간경영이었다.

 

공명은 다음 세대를 이끌 리더를 찾아 양성하는데 주력하였다. 일찍이 능력과 도덕성을 겸비한 인물로 키운 장완 외에도 비위, 강유가 있었다. 미관말직에 있던 비위를 정치적 리더로 키워나갔으며, 천수싸움에서 강유의 재능을 알아보고 군사 분야 리더로 키워나갔다. 공명의 ‘다음 세대 기르는 일’은 결코 ‘심복 키우기’가 아니었다. 국가의 장래를 떠맡을 재목을 골라 이들을 동량(棟梁)으로 양성했던 것이다.

 

일곱 째, 전략전술과 부대 운용이 탁월하였다.


 

먼저 핵심과제를 선정하고 집중하였다. 유비가 죽자 핵심과제인 북벌을 위해 형주를 과감히 포기하고 대신 오를 끌어들여 함께 위를 치는 것이 핵심이라고 판단하여 등지를 보내 오와 동맹을 맺는데 성공한 후, 이후 남만 정벌에 나섰다. 위나라가 국력에서 월등했으나 공명의 북벌 내내 고전했던 것은 아군은 집중하고 적은 두 개의 적을 맞아 힘을 분산시킨 공명의 전략 때문이었다. 적벽대전 때 정보전에서 패한 조조군은 치욕적인 패배로 이어졌고 천하통일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조조나 원소에 비해 공명의 정보에 대한 감각은 한 차원 높은 것이었다. 가끔 동남풍이 부는 것을 관찰하여 적기에 이용한 것 등 공개된 정보를 면밀히 살펴 활용할 줄 아는 것이 공명의 정보감각이었다. 주위에 널려 있는 것이 정보다. 문제는 그것을 어떤 목적과 기준으로 활용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제갈량이 군대를 이끌고 기산을 공격했는데, 진영이 잘 정돈되어 있고, 상벌이 엄숙하며 호령이 분명했다’고 정사 제갈량전에 기록되어 있다.

제갈량은 부대를 교모하게 통솔하였으며, 군령은 엄격하였다.

 

공명은 정적(靜的)스타일의 작전을 기반으로 임기웅변의 책략을 가미한 부대 운용에 뛰어났다. 1차 북벌 시 별동대로 조진의 본진을 유인한 점, 3차 북벌이 기습전 형태로 이루어진 점, 매복계를 통한 복병전에 능통했다는 점, 4차 북벌 시 위의 위나라 사마의가 함부로 대응하지 못하고 견벽거수(見辟擧守: 벽을 맞대고 수비만 함)전략으로만 일관했다는 것은 제갈량의 군사전략 능력의 탁월함을 반증하는 것이다.

 

공명을 특징짓는 또 하나의 덕목으로 그의 외교마인드와 협상력을 들 수 있다. 유비 사후 오나라와의 관계는 국가의 생존이 걸린 문제였다. 촉이 오와 동맹을 맺는데 실패하여 외교적으로 고립된다면 이는 곧 국가의 종말을 의미할 수도 있었다. 등지를 사신으로 보내면서 손권의 호의를 사는 데 큰 노력을 기울였다. 말 200필과 비단 2,000필을 비롯, 촉의 특산물을 함께 보냈다. 이에 손권이 답례로 오나라의 특산물을 보내왔고 동맹관계가 복원될 수 있었다. 이후 정기적으로 사신을 교환하며 우의를 다졌는데, 사신 중에 후일 촉을 이끌 비위 같은 인물들을 포함시켰다.

 

건안 13년(208), 조조가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행주마저 점령해 버리자 다급해진 유비는 공명을 보내 손권과 손을 잡고자 했다. 대의명분의 중요성을 잘 내세워 탁월한 논리로 손권으로 하여금 유비 진영과 손을 잡게 하고, 주유를 보내 적벽대전에서 조조에게 대승을 거두었는데, 공명의 명쾌한 논리와 탁월한 협상력이 얻은 결과였다.

 

공명은 동맹을 위한 협상이라고 하나 제시할 마땅한 카드가 없자 자존심을 건드려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이고, 다음 조조군의 허실을 설명하여 ‘우리와 손잡으면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준 다음, 전쟁이 끝난 후를 거론하며 ‘이익으로 상대를 설득’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공명은 일생을 통해 부단한 자기계발을 도모하였다.

그는 촉나라의 내정과 외교, 군사 분야까지 모두 관장하고 있으면서도 스스로를 갈고 닦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또 촉의 인재 개개인들을 속속들이 파악하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실무뿐만 아니라 학업을 계속하여 두뇌를 채우는 일과 행동 면에서 까지 부단한 자기계발을 했던 것이다. 제갈량은 8무(務), 7계(戒), 5구(懼)를 지었는데, 모두 조(條)와 장(章)을 두고, 신하를 엄하게 경계하고 있었다. 자신은 물론 신하들의 행동을 경계하기 위한 기록도 남겼던 것이다.

 

군사 분야에서 당시 획기적인 무기인 연노(連弩)를 발명한 것에 그치지 않고 연노만으로 편성된 독립부대를 만들고, 빠른 공격을 위해 산기대(散騎隊)와 무기대(武騎隊)라는 부대를 별도로 만들기도 했다.

공명이 촉나라에서는 존경받는 인물이 되고, 오나라에서는 튼튼한 파트너가 되고, 적국 위나라를 두려움에 떨게 한 것은 이렇듯 집요하리만큼 철저한 자기 노력과 개발 때문이었다.

 

제갈량은 한실중흥과 천하통일이라는 대의명분 아래 오직 능력과 도덕성을 중시하여 인재를 등용하여 백성을 안정시키고, 가야 할 길을 제시하고, 시대에 맞는 정책을 내고, 공정한 정치를 행하였다. 이리하여 영토안의 사람들은 모두 그를 존경하고 사랑했다.

형벌과 정치는 엄격했는데도 원망하는 자가 없었던 것은 그의 마음가짐이 공평하고 상벌이 명확했기 때문이다. 그의 유산인 뽕나무 800그루와 척박한 농토 15경으로 지도자로서의 청렴함의 표상이 되면서, 중국 역사상 지략과 충의의 전략가로서 수많은 이들의 추앙을 받을 자격이 있는 출중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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